달리기와 마라톤, 그 경계
2019년 아내와 함께 살기 시작할 무렵부터 러닝을 시작했다. 당시에 4-5km 정도씩 연습을 몇 번 하고, 뉴발란스 런온 서울에 참가해서 겁 없이 10km를 뛰었다. 당시 기록 1:13:45. 7분 23초 페이스로 달린 셈이다. 평소 잘 뛰지도 않았고 길게 뛰어 본 경험이 없는 아내가 10km를 한 번에 뛰려니 조금 힘들어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꾸준히 달려서 이 정도 성적을 거뒀다. 그때 매력을 느끼고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짧게라도 꾸준히 달리기를 했었다.
핸드폰만 들고 달리면 연습을 하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달리면서 계속 페이스를 체크하기도 어렵고, 심박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게 뛰고 있는지 (혹은 힘들어질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내랑 달릴 때는 아무래도 내 속도보다는 느려서 어렵지 않게 오래 뛸 수 있는 반면, 나 혼자 달리면 페이스 조절이 안 되고 초반부터 빠르게 뛰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금방 멈추게 된다.
가끔 대학원 시절에 받은 애플워치 시리즈 0을 사용하면서, 이것의 장점은 알고 있지만 무게도 너무 무겁고 성능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더 이상 OS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차마 운동이라는 단순한 그 목적으로 최소 몇 십만 원이나 하는 워치를 사기가 또 아까워서 매년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구경만 하고 넘기고 있었다.
다시 마라톤, 하지만 애플워치와 함께
아기가 생기고 한 동안 운동을 못 하다가, 올해 9월에 10주년 애플워치가 발매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념비적인 모델이기도 하고, 그동안 특별히 무언가를 잘 사지 않은 나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생일 선물 겸 구매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또 값어치를 하기 위해 애플워치를 사면 러닝을 꼭 하겠다 결심했다. 혼자 하는 웨이트는 재미없어 오래 못 하는 나에게, 러닝이라는 원초적인(?) 운동은 꽤 생각보다 재미있는 운동이니까.
9월 21일, 워치를 배송받은 후 첫 연습을 시작했다. 집에서 Nike Run Club 앱을 다운로드하고, 러닝 가이드를 워치에 받아 동기화하고 집 근처 트랙으로 나섰다. 일단 너무 오랜만이니까 가볍게 4km를 목표로 잡았다. 천천히 뛰면 30분 정도 될 테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나가서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뛰고, 그다음 주, 그다음 주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6분 페이스 정도로 4-5km씩 뛰었다. 몇 주 뛰고 나니 목표 없이 달리기만 하면, 흥미를 잃을 것 같아서 11월에 할 수 있는 마라톤을 찾아보았다.
10km 마라톤 대회 (정관장 블루런)
11월 말에 출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11월 초에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하지만, 애초에 신청 가능한 대회가 별로 없었다. 요즘 러닝 크루가 유행이라고 하더니, 대회 자체도 많지만 이미 매진된 대회도 많았다. 한 번쯤 들어봄직한 대회는 오래전에 마감이었고, 처음 보는 대회들 중 11월 초에 열리는 아직 접수받는 대회는 정관장 블루런이 유일했다. 10km 코스로 신청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장인어른과 처형도 마라톤에 같이 나가겠다고 하셨다. 장인어른은 꽤 잘 뛰셔서 10km 코스로 같이 뛰려고 하셨는데, 처형이 마라톤이 처음이라 5km에 나간다고 하니 함께 5km를 뛰시기로 하셨다. 나는 대회 전까지 가장 많이 뛰어본 게 6km인데 당일에 10km를 뛸 수 있을까 걱정도 조금 되긴 했지만, 생전 안 뛰어 본 것도 아니니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회 당일에 가족들을 만나서 스트레칭을 좀 하고, 나는 10km여서 먼저 출발하기 때문에 출발선에서 대기했다. 출발선 바로 앞에서 시작을 기다리며 다른 크루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잘 못 뛸 것처럼 생긴 사람들도 4:30, 4:00 페이스를 얘기하고 있어서 속으로 '와.. 나는 연습 때도 5:30이 최선이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잘 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뛰다 보면 어떻게 여차저차 따라가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스타트 사인이 나오고,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페이스를 확인해 보니 4:00 페이스였다. 이렇게 빠르게 뛰어 본 적이 없었다. 한 1km 정도 따라가다 보니 도저히 난 안 될 것 같아서, 페이스를 점점 늦췄다. 4:30, 5:00, 5:20... 점점 느려지는 내 옆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엄청 천천히 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페이스를 확인해 보면 5:10~5:20 정도였다. 이것도 내가 평소 연습하던 5:30 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확실히 주변의 환경이 내 인식을 결정하는 것 같다. 동네 트랙에서 천천히 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가 엄청 빠르게 뛴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느껴졌는데, 4분대 페이스의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보니 나는 엄청 천천히 뛰는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몸에는 힘들었는지, 4km쯤 가니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5km 반환점까지 무념무상으로 뛰고, 반대편에 오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2km를 더 갔다. 그러다 7km 배너를 보자마자, 갑자기 허벅지에 힘이 빠지며 힘들어졌다. 이때부터는 피니시 라인은 언제 나오나 생각하면서 달렸다. '지금 페이스 대로라면 15~20분은 더 가야 하는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이 엄청난 갈등을 하면서 2km를 더 갔다. 1km 정도를 남기고 이제는 죽을 것 같았다. 다시 평화의 공원으로 들어가는 오르막길 한 100-200m에서는 이제 그만 멈추고 싶었다. 그때 옆에 지나가는 분이 스스로에게 '파이팅! 할 수 있다!'를 외치며 가셔서, 그걸 의지 삼아 나도 더 갈 수 있었다.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지만, 페이스를 보니 조금만 힘내서 가면 50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평지 구간이 나왔고, 멀리서 피니시 라인으로 착각했던 지점을 지나 진짜 피니시 라인에 도달했다. 그 즉시 문자가 왔다. 완주를 축하합니다. 49분 16초. 5:30 페이스로 55분 목표를 잡았는데, 뛰어보니 얼떨결에 53분, 52분까지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고, 마지막에는 50분 언더로 들어왔다. 4:56 페이스였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달렸다보니, 도착해서 잠깐 쉬는데 목에서 피가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다음 목표: 하프 마라톤
이번에 10km 마라톤에서 목표는 55분(5:30 페이스)이었는데, 초과 달성하였다. 대회 버프가 있긴 했겠지만, 내 생각보다 더 잘 뛰는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하프 마라톤이다. 하프마라톤은 21.0975km로, 10km를 두 번 뛰고도 약 1km를 더 가야한다. 길이가 길어질 수록 페이스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번 대회보다 조금 더 느린 페이스로 달려볼까 싶다. 가능하면 하프는 2시간 내로 들어오면 좋겠다. 아내가 조리원에 들어가고 나면, 점심 시간에 달리기 연습을 좀 해야겠다.
하프 마라톤 큰 대회는 내년 4월에 있다. 4월 6일에는 JTBC에서 주관하는 2025 고양특례시 하프마라톤이 있고, 4월 27일에는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2025 서울하프마라톤이 있다. 엊그제 고양 하프마라톤은 신청을 받았는데, 출산을 앞두고 일이 바쁘다보니 깜박하고 신청을 못 하였다. 3월에 추가 접수가 있다고 하니 그때를 노려봐야겠다. 서울하프마라톤은 12월 중순에 신청을 받으니 그걸 노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서울하프마라톤은 너무 서울 시내 한복판을 뛰어서 부담스럽고, 가능하면 고양 하프마라톤을 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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